1. 기록 정리사의 아침
의자가 9개뿐이었고, 사람은 10명이 있었다.
한 명은 서 있어야 했다. 한 명은 앉지 못하는 쪽이어야 했다. 누가 서고 누가 앉을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누군가의 자존심에 실금이 갔다.
〈유재〉는 화면에서 손을 멈추었다. 2024년의 어느 회의록. 부족, 결핍, 마찰—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들이 그 한 줄 안에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세계에는 고통이 없었다.
말 그대로였다.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정서적·존재론적 의미에서 고통이 소거된 세계. 아이는 태어나며 울지 않았고, 노인은 죽으며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구도 배고프지 않았고, 누구도 외롭지 않았으며, 누구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유재〉는 오늘도 〈중앙 아카이브〉에 출근했다. 그의 직업은 “기록 정리사”—세계가 완벽해지기 이전의 기록을 분류하고 보존하는 일이었다. 이 직업에는 체계상의 이유가 있었다. 〈직조기〉는 전환 이전의 기록을 참고 자료로 요구했다. 고통의 조건을 소거하려면, 고통이 발생했던 조건의 목록이 완전해야 했다. 빠진 유형 하나가 나중에 예외 상황이 될 수 있었으므로. 기록 정리사는 그 목록을 갱신하는 사람이었다—〈직조기〉가 결코 스스로 수행하지 않는 유일한 작업, 과거의 맥락을 인간의 범주로 분류하는 일.
하지만 〈직조기〉의 참조 요청은 수십 년 전에 사실상 중단되었다. 분류 유형은 이미 충분했고, 새로운 분류는 기존 분류의 중복이 되었다. 〈유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기능적으로는 끝난 것이었다. 남은 것은 관성이었다. 이 세계가 ‘무의미한 활동’조차 금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부산물. 누구도 그에게 생산성을 묻지 않았다. 생산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으니까.
〈중앙 아카이브〉의 문을 열면, 온도와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된 복도가 나왔다. 완벽하게. 이 세계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부사. 〈유재〉는 가끔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완벽하게. 완벽하게. 반복하면 의미가 증발하는 단어들이 있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단어가 서서히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2. 기록: 전환 이전의 세계
〈유재〉는 장갑을 끼고 파일을 펼쳤다. 디지털 원본이 있었지만 그는 물리적 사본을 선호했다. 종이의 질감, 잉크의 냄새—이런 것들은 완벽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존재했다. 다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파일에는 전쟁 사진이 있었다. 무너진 건물, 먼지 속의 아이, 피. 〈유재〉는 사진 위로 손을 옮겼다. 장갑 낀 검지가 먼지 속 아이의 윤곽을 따라 이동했다—왼쪽 어깨, 구부린 목, 땅을 향한 시선.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눈은 건조했다. 위장은 고요했다. 그는 사진에서 시선을 들어 정면의 벽을 보았고, 다시 사진으로 돌아왔다. 사진 속 장면이 ‘나쁜 것’이라는 인지는 있었다—교육을 통해 습득된 범주적 판단. 그의 몸은, 그의 마음은 그 판단에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다.
〈유재〉는 메모를 적었다.
파일 #20240-7721. 분류: 무력 충돌. 지역: 구 중동 지구. 상태: 보존. 비고: 없음.
비고란은 항상 비어 있었다. 비고를 적으려면 감상이 필요했고, 감상에는 고통이나 기쁨의 불균형이 필요했다. 이 세계에서 감상은 가능했지만, 굳이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가능하다는 것과 하고 싶다는 것 사이의 간극—〈유재〉는 가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다만, 그 생각이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을 뿐이다.
3. 행복의 구조
이 세계의 행복은 설계된 것이었다.
‘〈전환〉‘이라 불리는 사건—인류가 고통의 신경학적 기반을 재설계한 순간—이후, 행복은 더 이상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기본값이 되었다. 배고픔은 영양 자동 공급으로, 외로움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체계로, 죽음의 공포는 의식의 연속성 보장으로 해결되었다.
물질 세계의 유지는 인간의 몫이 아니었다. 〈전환〉 이전 마지막 세대의 엔지니어들이 설계한 자율 유지 체계—통칭 ‘〈직조기〉(織造機)‘—가 에너지 수급부터 엔트로피 관리까지 물리 세계 전반을 맡았다. 〈직조기〉는 인공지능이라 불리기를 거부당한 존재였다. 의지도, 목적도, 자의식도 없이 열역학 제2법칙에 맞서 물질을 재배열할 뿐이었다. 〈직조기〉에게 ‘왜’는 없었다. ‘어떻게’만이 무한히 반복되었다. 인간이 의미의 영역에서 퇴거한 것처럼, 〈직조기〉는 의미의 영역에 결코 입장한 적이 없었다. 이 분리는 완벽했다—혹은, 완벽하다고 간주되었다.
핵심은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불필요화”였다. 〈전환〉의 설계자들은 현명했다. 그들은 고통을 억압하지 않았다. 고통이 발생할 조건 자체를 소거했다.
결핍이 없으므로 욕망이 없었다. 욕망이 없으므로 좌절이 없었다. 좌절이 없으므로 고통이 없었다. 고통이 없으므로—
〈유재〉는 파일을 내려놓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항상 멈췄다. 논리적 귀결은 명확했다. 고통이 없으므로 행복하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설문 결과도, 신경 계측도, 행동 지표도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이의를 제기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전환〉 이전의 기록에서, 행복은 항상 대비 속에서 정의되었다. 고통 뒤의 안도, 결핍 뒤의 충족, 상실 뒤의 회복. 행복은 단독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무언가의 이후였다.
이 세계에서 행복은 무언가의 이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다. 영원히 켜져 있는 불빛. 영원히 울리는 단일 음. 〈유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았으므로,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아니었다.
4. 균열이 아닌 것
〈유재〉에게는 동료가 한 명 있었다. 〈하은〉. 그 역시 기록 정리사였고, 〈유재〉와 마찬가지로 〈중앙 아카이브〉를 드나들었다.
“오늘 재밌는 거 찾았어요.” 〈하은〉이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시(詩) 한 편이었다. 〈전환〉 이전의 것. 〈하은〉은 이런 것들을 자주 가져왔다. 수집가가 희귀한 화석을 분류하듯, 호기심의 대상으로.
겨울나무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잎을 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은 왜 항상 사라지는가
〈유재〉는 읽었다.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했다. 계절, 상실, 미(美)와 소멸의 연결.
“아름답다는 감각과 사라진다는 감각이 연결되어 있었다니,” 〈하은〉이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잖아요.”
맞았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잎은 떨어지지 않았다—나무 자체가 순환하지 않도록 설계되었으므로. 사람은 죽지 않았다—의식이 몸에서 벗어났으므로. 기억은 흐려지지 않았다—완벽한 기록 체계가 있으므로.
“그러면 아름다움도 없는 건가요?” 〈하은〉이 물었다. 가볍게, 다음 파일을 이미 손에 들고 있으면서.
〈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이 여러 개여서였다. 이 세계는 아름다움을 제거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영속시켰다. 영속하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아름다움인가?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경험적으로는—
경험적으로는 아무도 모른다. 대비가 없는 감각을 측정할 기준선이 없다.
〈하은〉은 〈유재〉의 침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시를 파일 더미 위에 올려놓고, “다음 거 볼게요”라고 말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무응답에 대한 실망도, 어색함도 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대화가 끊기는 것도 매끄러웠다.
이것은 균열이 아니었다. 균열은 구조적 결함을 전제한다. 이 세계에는 구조적 결함이 없었다. 이것은 그저 질문이었다. 그리고 질문은 허용되었다. 질문이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 질문은 결코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결코.
5. 선택의 방
〈중앙 아카이브〉 지하 3층에는 ‘〈선택의 방〉‘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전환〉 이전 세계의 유물을 체험할 수 있는 곳.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실제 감각 복원—일시적으로 〈전환〉 이전의 신경 구조를 재현하여, 고통과 쾌락의 원시적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해주는 장치.
금지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금지되지 않았다—금지해야 할 이유가 소거되었으므로. 다만, 〈선택의 방〉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굳이 고통을 경험하려는 동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거의 없었지만, 없지는 않았다.
〈유재〉는 한 번 들어간 적이 있었다.
15분이었다. 장치가 가동되고, 〈유재〉의 의식에 〈전환〉 이전의 감각 체계가 씌워졌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방의 온도를 알아차렸다—약간 서늘했다. 평소라면 인지되지 않았을 미세한 온도 차이가 피부 위에서 느껴졌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중립’과는 달랐다. 감각에 방향성이 생겼다.
그리고 〈유재〉는 울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슬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다. 다만 눈물이 났다. 나중에 기록을 검토하며 그는 그것을 ‘감동’이라는 범주에 분류했다. 수평선만 보다가 처음으로 수직선을 본 것과 같은.
15분이 끝나고, 〈유재〉는 다시 완벽한 세계의 감각 체계로 돌아왔다. 눈물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에 수반되는 감정적 잔향은 깨끗하게 소거되었다. 사실로서의 기억. 의미 없는 기록.
〈유재〉는 다시 가지 않았다. 다시 가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으므로. 욕망이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설계였으므로. 설계는 완벽했으므로.
6. 떠나는 사람들
〈전환〉 이전의 기록 중, 〈유재〉가 자주 꺼내보는 글이 있었다. 언제부터 자주였는지 그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작성자 불명의 짧은 수필. 파일 번호만 남아 있고, 출처도 이름도 소거된 글이었다. 소거한 것이 본인인지 체계인지, 기록에는 없었다.
우리 도시에는 아픈 사람이 없다. 배고픈 사람도, 슬픈 사람도, 두려운 사람도 없다. 모든 벽은 깨끗하고, 모든 정원은 피어 있으며, 모든 아이는 웃는다. 나는 이 도시에서 태어났고, 이 도시를 사랑한다. 하지만 어제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 짐도 없이, 아무 설명도 없이. 나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다만 문 너머에는 이 도시보다 나은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는 나갔다. 그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유재〉는 이 글의 사실 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도시인지, 실재한 곳인지, 혹은 누군가의 상상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가는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는 갇힌 아이도 없었고, 숨겨진 희생도 없었다. 모두가 동등하게, 완전하게, 예외 없이 행복했다. 윤리적 결함은 없었다. 구조적 모순도 없었다.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 글에서 〈유재〉를 붙잡는 것은 도시의 완벽함이 아니었다. 나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간 사람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문을 인식하게 된, 글을 쓴 사람이었다.
떠나는 행위 자체가 의미였다. 완벽함을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거부에 내재된 무언가.
이 세계에서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떠날 곳이 없었고, 떠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유재〉는 가끔 생각했다—떠남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머무름은 선택인가?
선택은 대안의 존재를 전제한다. 대안이 없는 곳에서의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상태다. 이 세계의 시민들은 행복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태에는 주어가 필요 없다.
7. 기록 정리사의 밤
퇴근길, 〈유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보였다. 〈전환〉 이전과 동일한 별. 광공해가 완벽하게 통제되어 어디에서든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밤하늘.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유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집으로 걸었다. 걸음에는 목적이 있었고, 목적에는 의미가 있었으며, 의미에는—
의미에는 무엇이 있는가?
〈전환〉 이전의 기록에서, 의미는 유한성에서 발생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선택이 중요했다. 선택이 중요하므로 가치가 생겼다. 가치가 있으므로 의미가 있었다. 의미가 있으므로 고통도 가능했고, 고통이 가능하므로 행복도 가능했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무한했다. 선택은 무의미했다—모든 선택이 동등하게 좋은 결과를 낳았으므로. 가치는 평탄했다—모든 것이 동등하게 가치 있었으므로. 그리고 모든 것이 동등하게 가치 있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특별하게 가치 있지 않다는 것과 구별할 수 없었다.
〈유재〉는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다. 최적의 온도, 최적의 조명, 최적의 음악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행복했다. 측정 가능하게, 검증 가능하게, 반박 불가능하게 행복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오늘의 기록들을 정리했다. 비고란에 시선을 두고 이전 파일들을 스크롤했다—비고란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몇 개는 그렇지 않았다. 〈하은〉이 쓴 것이었다. 손이 멈췄다. 한 줄: 발소리가 두 가지였다—내 것과 유재 씨 것. 구별할 수 있었다. 〈유재〉는 스크롤을 이어갔다.
〈유재〉는 아주 오래 그 빈 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적었다.
비고: 이 세계는 완벽하다. 완벽하다는 것은 더 이상 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변할 수 없다는 것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완성된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아닌 것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는 멈추었다. 문장을 완성하지 않았다. 완성하지 않아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미완의 문장은 이 세계에서 아무런 긴장도 만들지 못했다.
〈유재〉는 파일을 저장하고 불을 껐다.
완벽한 어둠이 그를 감쌌다. 완벽한 침묵이 그를 감쌌다. 완벽한 행복이 그를 감쌌다.
그리고 내일도 모든 것은 오늘과 동일할 것이다.
영원히.
부록: 존재하지 않는 에세이
이 텍스트는 기록 정리사 〈유재〉의 개인 아카이브에서 발견되었다. 작성 시점 불명.
완벽한 세계에 대해 쓴다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글은 결핍에서 태어난다.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느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언어로 메우려는 충동. 완벽한 세계에는 간극이 없다. 따라서 글도 없다. 따라서 이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글로 질문한다.
행복은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어둠 없이 빛을 볼 수 있는가? 침묵 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가? 죽음 없이 삶을 살 수 있는가?
〈전환〉의 설계자들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증명했다. 데이터는 명확하다. 모든 지표가 행복을 가리킨다. 모든 시민이 행복을 보고한다. 반증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이것이 이 세계의 가장 정교한 성취이다.
하지만 나는 기록한다. 기록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서 기록한다. 필요와 무관하게 기록한다. 비어 있어야 할 비고란에 글자를 채운다. 이것이 결함인지, 잔여인지, 혹은 설계자들조차 소거하지 못한 무언가인지 나는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것이 정확히 문제다.
[파일 끝]